이름 | 김남경 | 등록일 | 2014-02-19 16:27:02 | 조회수 | 1114 |
첨부파일 |
지 휘 _ 강 석 희
지휘자 강석희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동아음악콩쿨, 중앙음악콩쿨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창악회, 아시아 작곡가 연맹, 미래악회 등에서 여러 창작곡들을 지휘하였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연구원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그라쯔 국립음악원 지휘과에서 Martin Turnovsky를 사사 하였고,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 국립음악원 모짜르테움에서 관현악지휘(Michael Gielen) 및 합창지휘(Walter Hagen-Groll)를 전공하며 두 과정 모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여 디플롬 및 Magister를 취득하였다. 그는 Budapest Symphony Orchestra, Nuernberger Symphonker, Romania Oltenia State Philharmonic Orchestra, KBS 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서울시교향악단, 부천시립교향악단,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강남심포니 오케스트라, 원주시립교향악단, 제주시립교향악단, 대구시립교향악단, 충남도립교향악단, 바로크 합주단 등 국내 유수 교향악단과 앙상블을 지휘하였다. 오페라와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음악을 소화해내는 그는 섬세한 지휘와 탁월한 곡의 해석력을 지닌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수원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 단국대학교 교수, 한국음악협회 이사를 역임하였고 현재 사단법인 한국지휘자협회 이사, 전주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재직중 이다.
Program
M. Glinka / Overture "Ruslan and Ludmilla“
글린카 / 서곡 “루슬란과 루드밀라”
P. I. Tchaikovsky / Symphony No. 6 in b minor “Pathetique” Op. 74
차이콥스키 / 교향곡 6번 나단조 “비창” 작품. 74
Ⅰ. Adagio-Allegro non troppo
S. Rachmaninoff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마단조 작품. 27
Ⅲ. Adagio
Program note
M. Glinka / Overture "Ruslan and Ludmilla“
글린카 / 서곡 “루슬란과 루드밀라”
글린카의 두 번째 가극이며, 시인 푸시킨의 같은 이름의 서사시에 바탕을 두고 작곡했다. 1842년 11월 27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나, 그 상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야기는 러시아의 옛 민화에 의했으며, 키에프 대공의 딸 루드밀라가 악마 체르노몰에게 유괴된 것을 3명의 기사가 도와준다는 줄거리로서, 기사들 중의 한 사람인 루슬란이 마지막에 루드밀라를 구출하여 해피엔드가 된다. 오늘날 가극은 상연되지 않고, 서곡만 연주회용 프로그램을 장식하고 있다. (연주시간 : 약 6분)
P. I. Tchaikovsky / Symphony No. 6 in b minor “Pathetique” Op. 74
차이콥스키 / 교향곡 6번 나단조 “비창” 작품. 74
초연은 1893년 10월 28일 페트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지는데 특이한 곡 형식과 절망적인 느낌으로 인해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초연 다음 날 차이콥스키는 작품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작품에 표제를 넣을까 고민하였다. 그때 동생이 비창(Pathéthique)이라는 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즉석에서 악보에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교향곡이 <비창>이 된 것이다. <비창> 초연 후 차이콥스키는 9일 후에 갑작스레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콜레라라는 것이 그의 전기에 쓰여져 있다. 죽기 며칠 전에 끓이지 않은 물을 먹고 콜레라에 점염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러시아는 콜레라가 만연되어 있어 그가 아주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자살설이 파다하였고 20세기의 연구가들도 그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동성애의 추문을 피하고자 누군가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니 병사가 맞다고 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이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떠났다. 죽음에 앞서 폰 매크 부인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차이콥스키가 죽고 나서 <비창>이 다시 연주되었을 때, 이제는 관객들도 그의 뜻을 알았는지, 그의 죽음에 감명되었는지 연주회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S. Rachmaninoff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마단조 작품. 27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제2번]는 제1차 러시아 혁명 직후에 작곡되었다. 1906년 봄, 귀족이자 지주였던 라흐마니노프는 국내 정세에 불안을 느껴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러시아를 잠시 떠나 있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탈리아로 갔다가, 여름에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3년 동안 지내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주의 또 다른 이유는 작곡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었다. 그 직전까지 그는 성공한 음악가로서 너무도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1901년에 발표한 재기작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글린카상을 수상하면서 작곡가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 이전부터 부각된 지휘자로서의 역량은 그를 작곡보다는 연주활동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광스런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 자리에까지 올라 두 시즌을 성공리에 치러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퇴임 압력을 받게 되자 그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드레스덴에서 그는 원했던 대로 작곡에 매진하여 실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교향곡 제2번]을 필두로 [피아노 소나타 제1번], 걸작 교향시 [망자의 섬], 미국 순회연주를 위해 준비한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등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제2번]의 의미는 각별했다. 과거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의 불안과 위기를 예술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작곡 불능 상태에까지 빠지게 만들었던 [교향곡 제1번]의 실패 이후 실로 10여 년 만에 재도전한 ‘교향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후 다시 한 번 글린카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그는 명실상부 차이콥스키의 후계자이자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