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관리자 | 등록일 | 2017-12-16 20:14:26 | 조회수 | 3471 |
30m 줄지어선 韓紙 인형들… 영조대왕 혼례행렬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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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71216/87755723/1#csidx75e5743e5239064abef4fe5ee8df68a
[손진호 전문기자의 人]한지공예로 외규장각 의궤 속 역사 재현하는 양미영 씨
“이걸 정말 다 손으로 만들었다는 건가요?”
전시장을 찾은 유럽 관람객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고 또 물었다. 프랑스 기자들도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1759년 66세의 조선 국왕 영조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 장면을 한지조형(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데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프랑스 앙부아즈 클로뤼세성에서 4월 말∼5월 말 열린 ‘역사, 공예와 만나다-영조 정순왕후의 가례행렬’전은 한지조형의 창의성과 아름다움을 유럽에 한껏 떨친 전시회였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외규장각 의궤 297책 중 1책의 50개 면에 걸쳐 그려져 있는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班次圖) 행렬을 1100여 점의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것. 외규장각 의궤는 약탈당한지 145년 만인 2011년 프랑스로부터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의궤가 완전히 우리의 문화재가 되는 그날을 상상하며 한 땀 한 땀 인형을 만들었다”는 한지 조형작가 양미영 씨(51)의 땀과 꿈이 오롯이 배어있다.
혼례 행렬 반차도에는 사람과 말, 가마와 의장류 등 2600여 점이 등장한다. 이 중 양 작가가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1100여 점을 전시한 것. 반차도는 혼인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늘날의 결혼식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을 보낸 클로뤼세성 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앞서 지난해 11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카루젤관과 파리 7대학에서 잇따라 열린 의궤 닥종이 인형 전시회에 매료된 클로뤼세성 대표가 모든 비용을 대며 초청한 것이다. 파리 7대학은 의궤를 우리나라로 들여오기 위해 노력한 재불 서지학자 고 박병선 씨가 박사학위를 받은 곳. 박 씨가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하기 전까진 국내에서 누구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런 만큼 파리7대학에서의 전시는 의미가 남달랐다.
11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꽃숙이 공예 공방촌’을 찾았다. 다소 시끄럽고 번잡해진 한옥마을에 살짝 숨어있는 기와 골목 끝자락이다. 공방에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데 인형의 몰골이 형편없다.
“세 차례에 걸친 유럽 전시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전주시청과 지방행정연수원 갤러리에서 전시하다보니 얘네들도 탈이 날 수밖에요.(웃음) 해외 전시는 사실 연 1회 열기도 버거워요. 파리 전시를 마치고 클로뤼세성에서 전시하려고 보니 ‘왕 가마’가 부서져 있더라고요. 파손 상태가 심해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양 작가는 늘 하던 일이어선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인형 제작 작업이 더딘 까닭을 알 것 같다. “작품전시가 끝나면 인형을 고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기록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기회 있을 때마다 전시할 겁니다.”
대학 졸업과 결혼 후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양 작가가 한지조형에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마흔 줄에 접어들면서부터다. 2007년 전주시 어진박물관에 있는 ‘태조어진 봉안행렬’을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손을 거쳐 입체 조형물로 되살아나는 조선 기록문화유산의 위대함에 매료됐다. 2년간 5명의 작가와 함께 작업해 사람 321명, 말 55필, 의장류 등을 한지조형으로 되살렸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비로소 깨달았다. 망설임 없이 ‘역사와 공예가 만나는’ 길로 들어섰다.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에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고 박병선 씨의 말씀을 신문 지면을 통해 접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마침내 영구임대 형식으로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에 돌아오자 의궤의 기록물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다는 반차도를 인형으로 재현해 조선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이 용솟음쳤습니다.”
2014년 본격적으로 반차도 재현에 뛰어들었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임을 잘 알기에 여러 공예작가와 함께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혼자서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야할 때 가지 않으면 정작 가려고 할 때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뜻밖에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우석대 경호비서학과 학생들이 돕겠다며 달려왔다. 이제껏 한지를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학생들이 정성스레 인형을 만드는 모습을 보니 힘이 절로 솟아났다. 돈 안 되는 일에 인생을 건 작가의 뜻에 공감해 전주시,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전통문화전당 한지산업지원센터 등이 후원에 나섰다.
2014년 6월에 시작한 작업은 현재까지 반차도 행렬 50개 면 중 24개 면을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사람 792명, 말 179필, 가마 4채, 의장류 등이다. 한 줄로 세우면 30여 m나 된다. 아쉬운 건 제대로 전시할 공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입체감을 살리려면 일렬로 세워야 하지만 대부분 ‘ㄷ’자 등 구불구불한 형태로 전시하는 실정이다.
인형으로 재현하는 인물과 사물들이 행여 의궤에 어긋날까봐 전문가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쫓아다녔다.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에게 의장기(儀仗旗)·의장물을,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관에게 조선시대 복식을,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에게 제작 전반의 도움말을 구했다. 인터뷰 도중 양 작가는 인형 하나를 집어 발바닥을 들어보였다. ‘11-25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이 인형의 혼례 행렬 순서가 253번째이며 11쪽에 있다는 뜻이다.
인형 한 개를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궁금했다. “인형을 하나씩 만드는 게 아니라 얼굴을 만들고, 손과 몸통을 만들어요. 부분적으로 만들어 놓고 전체의 비율을 잡지요. 한지에 풀을 바른 후 사용하기 때문에 마르는 과정에서 걸리는 시간이 깁니다. 팔다리에 살 붙이는 작업은 아르바이트생들의 몫이지요. 손으로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인형 만들기는 ‘시간을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인형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은 ‘얼굴 표정’이라고 한다. 의궤 속 등장인물은 얼굴 옆면과 뒷모습밖에 없다. 그러므로 얼굴 표정은 순전히 작가의 몫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형은 영혼과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그들은 생명력 넘치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선 하나에 눈빛이 달라지고, 미소를 표현하는 방법만도 수십 가지가 넘지요.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며 조선시대 사람들의 얼굴을 풍부하게 표현하려 고심했습니다.”
그는 3년 넘게 의궤에 파묻혀 지냈다. 잠자면서도 인형을 생각하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인형을 만들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제작한 인형이 늘어날수록 손가락은 아파오고,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2015년 3월 하루 새벽에 응급실을 두 번 가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작가는 남아있는 반차도를 모두 재현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든다면서도 “꼭 해내고 싶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클로뤼세성 전시 때 그곳 큐레이터인 상드린 사바나 씨가 그러더군요.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베르사유 국립도서관 직원인 그녀의 어머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 역시 의궤가 얼마나 귀중한 문화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거지요. 고국으로 돌아온 위대한 문화재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양 작가는 혼례 행렬 인형 중 특히 철릭에 공이 많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철릭은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 정삼품 이상의 당상관은 남색, 정삼품 이하의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다채로운 색이 빛을 발하는 여느 옷과 달리 철릭은 한가지 색으로 만들었는데도 한복의 우아함과 품위를 잘 보여준다는 것.
“힘닿는 데까지 우리 역사를 한지 인형으로 재현하고 싶습니다. 제 작품을 보면서 우리 역사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만들고 있던 한지 인형 앞으로 다시 다가앉는 그의 손끝에서 조선 왕실 문화가 오롯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영조-정순왕후 혼례 반차도는▼
50쪽 채색… 등장인물만 1000여명 최초의 기록화
66세 영조, 15세 신부 맞이 장면
왕 상징 가마만… 모습은 안보여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는 1759년(영조 35) 영조가 정순왕후를 친영(親迎)하러 가서 왕비와 함께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국왕과 왕비의 수행 인원과 상징 의장 전체를 묘사한 최초의 기록화이다. 당대의 역량 있는 화원((화,획)員)들이 그렸다.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50쪽에 달하는 채색 그림이고, 등장인물만도 1000여 명에 이르는 대단한 기록화”라며 “다만 실제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반차도 등장인물보다 다섯 배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시위 병력이 반차도에는 400명가량 그려져 있는데, 의궤 내용을 보면 이들 병력이 최소한 1130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반차도의 맨 앞에는 사령을 앞세운 당부관(當部官)의 말 탄 모습이 등장한다. 당부관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5부의 담당 관리로 오늘날 구청장에 해당한다.
수많은 병력의 호위 속에 왕의 가마가 나타나는데,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개방형이다. 하지만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의식이나 행사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행이었다.
국왕 가마의 행렬이 끝나면 왕비 가마 행렬이 뒤따른다. 너울을 쓴 말 탄 시녀 12명과 의녀 2명이 좌우에서 왕비의 가마와 거의 나란히 따른다.(‘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신병주)
반차도에는 각종 악기가 보이지만 당시 음악은 연주되지 않았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혼례가 기쁘기 이를 데 없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는 부모의 세대가 저물고 다음 세대가 이어진다는 것이 마냥 기쁜 일은 아니라는 성리학적 인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행렬의 군데군데 국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향이 피워져 있다. 행차를 따라 배치된 횃불은 서울의 밤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아 한껏 잔치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