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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연구소 실학산책 제340호 조광 원장님 "정교분리의 의미[1]"
이름 관리자 등록일 2014-05-02 09:49:58 조회수 1521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즉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본성상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종교와 인간사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나타난다. 정치인류학에서는 인류사의 초창기에는 ‘샤먼 킹’(shaman king)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샤먼 즉 무당이 정치적 권력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

  샤먼 킹의 존재는 신정(神政)정치의 원형을 제공해 주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등장했던 신정정치는 그 시대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중세사회에서도 종교가 세속권력을 지배하던 사례가 있고,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특정 종교이념을 현실정치에 밀착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정치권력이 종교와 맺고 있는 상호관계는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형태를 달리하면서 줄곧 변해왔다. 그러다가 근대국가 단계에 이르러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은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정교분리를 헌법적 가치로 존중하고 있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치의 인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권은 종교를 박멸하고자 하는 시도를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예를 들어, 서양사에서는 특정 철학으로 종교를 대체시키려는 노력이 전개되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과학과 이성의 빛을 인간 내면에 비추어 종교를 없앨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세기 후반기 이래 공산주의 이론에서도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여 특정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이를 대체시키고자 했다.

  이럴 때마다 종교는 극심한 탄압에 직면했지만, 그러한 정치적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정교분리론으로 돌아갔다. 정교분리론은 종교와 세속의 정치는 서로 다르고,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발상에서 제기된 이론이었다. 또한 이는 종교의 존재를 정치에서 인정하고, 동시에 종교는 정치에서 지향하는 세속적 가치의 정당성을 승인해야 한다는 타협안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치의 분야와 종교의 분야는 엄격히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영역이므로 상호 상대의 영역에 대한 간섭을 하지 말자는 논의로 전개되었다.

  즉, 초창기 정교분리론은 성(聖)과 속(俗)이 구별된다는 이원론적 사고방법에서 출현했다. 종교가 속(俗)의 영역을 인정한 것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선성(善性)이 있음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는 선을 향한 인간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인정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류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세속적 질서가 드러내게 된 반(反)인간적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치즘의 등장과 같은 인간성에 반하는 현상에 대해 과연 종교는 정교분리라는 원칙에 안주하며 방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 결과 종교는 개인윤리뿐만 아니라 사회윤리의 중요성을 심각히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종교는 개인구원 위주의 교리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올바로 이끌기 위한 사회교리를 발전시켜 갔다.

한국사에서의 정교분리론

  조선왕조는 정치종교로 규정할 수 있는 성리학적 가치를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그러기에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성리학을 설정하고 이를 정학(正學)이라고 규정했다. 이 정학의 가르침에 조금만 어긋나도 그것은 곧 ‘그릇된 가르침’이란 뜻을 가진 사학(邪學)으로 규탄되었고 탄압을 받았다. 정학과 사학의 이분법적 구분 아래에서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았고, 18세기 말 이래 천주교가 탄압을 받았다.

  당시 조선왕조는 정교분리라는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권력은 당연히 사학으로 지칭되던 종교 사상들을 탄압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이를 신봉하던 이들은 자신의 사상이 정치와 무관하지만 탄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전반기 일부 서양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활동이 조선이란 국가에 무해함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설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조선에 들어온 구미의 선교사들도 정교분리에 대한 관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양에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성공시킨 일본의 경우에도 서양식 정교분리의 개념을 채택했다. 조선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 감리교의 책임을 지고 있던 해리스(Harris) 감독에게 ‘우리는 조선의 정치에 책임을 질 것이니 너희는 조선인의 영혼을 책임지라’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즉, 조선에 있어서 종교는 정치에 간여하지 말고 오직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만을 책임지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이 원칙에 찬동했다. 그들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신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종교계의 상층부는 일반적으로 식민당국의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식민지배라는 정치현실이 종교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식민지라는 파행적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데에 적극적 기여를 할 수 없었다.

현대사회의 정치와 종교 문제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남북대립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는 종교의 가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하여 많은 종교인들은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이 취했던 반공주의는 분명 정치적 행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에서는 종교계의 정치참여를 나무라지 않았다. 종교계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치계의 지향점이 일치했던 까닭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세계의 역사는 바뀌어 갔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방법을 극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모두 자신이 지향하는 선성(善性)에 따라 인간의 발전과 구원을 추구한다고 규정하게 되었다. 즉, 종교와 정치는 인간의 구원을 함께 목적으로 삼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분리시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여기에서 정치현실에 대한 종교의 발언은 사회윤리에 대한 가르침의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구별될 뿐이라는 사고가 생겨났다. 그리고 종교인의 정치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계의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치권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정치계에서는 성과 속의 분리를 다시 주장했다.

  그럼에도 종교계는 정치권력의 행사과정에서 드러나는 비인간적이거나 반인간적 요소들에 대한 공격과 지적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이러한 자신의 행위가 정치적 행위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인간구원에 궁극적 목적을 둔 종교의 입장에서는 부당한 현상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지난 1970년대 전후 한국사회에서는 정교분리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정부 당국에 대해 “교회에서 수행하고 있는 반공주의는 정치 참여가 아닌가?”라고 반문한 바도 있었다. 교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가 인간성에 반하는 이념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전개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질서라 하더라도 부정과 불의, 부패 등의 현상은 인간성의 순탄한 발전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당연히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에 정부는 교회법에 있는 성직자의 정치간여 금지 조항을 들어서 맞서려 했다. 현행 가톨릭교회 법전에 “정치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성직자가 국회의원과 같은 선출직 공직이나, 장관과 같은 직책 그리고 정당이나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하지 말라는 구절이었다. 물론 이러한 직책이라 하더라도 상급자의 승인이 있을 경우에는 맡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이 조항이 성직자가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최고 형태의 자선은 정치”라고 말하면서 참다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발언을 통해 사회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 ‘정치적’ 발언에는 성직자도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치와 종교는 상호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구분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정치의 방법으로 인간의 구원을 말한다면, 종교는 종교의 방법인 기도와 증언을 통해 정치가 나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모든 국민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관행에도 합치되는 행동이다.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주장되었던 정교분리라는 단어는 21세기 현재의 기준에 따라 정교구분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을 영적 존재와 육적 존재로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듯이 정치와 종교의 관계도 결코 분리될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제도 사회발전의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는 국민의 일원으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이를 자신의 이웃에게 증언할 책임까지도 있다. 즉, 정교분리론은 정치인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교분리론은 종교인이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전라북도 군산에서 있었던 가톨릭 사제 박창신의 발언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현대의 정교분리론은 종교인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규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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